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진주성 전투 (문단 편집) === 6월 29일 === [[파일:external/file1.bobaedream.co.kr/park1298520031.jpg]] 마지막 날, [[황진]]을 대신해 서예원을 순성장으로 삼았지만 서예원이 겁을 내며 울고 다닌다고 해서 경상 우[[병마절도사|병사]] [[최경회]]는 서예원을 [[즉결처분|참하려고 하다가]] 그만두고, 대신 장윤을 순성장으로 삼았지만 곧 전사했다. 이날 폭우가 내려 동문이 무너져 일본군이 난입해오자 이종인이 이를 일시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다시 귀갑차를 활용해 북쪽 성벽도 무너뜨리려 시도, 정오 무렵 기여코 이에 성공하면서 북쪽을 담당하던 창의군이 무너졌고 결국 이쪽으로도 일본군이 난입하면서 진주성은 함락된다. 수성장 김천일과 그 아들인 김상건, 최경회와 고종후, 최기필 등은 물에 뛰어들어 자결을, 김준민 이하 장수들 대다수는 싸우다 전사했으며 이종인은 적병 둘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했고 목사 서예원은 도망치다가 잡혀 죽었다. (일본측 기록에서는 목사가 싸우다 부상을 입고 나무에 앉아 있는 것을 공격해 죽였다고 한다.) 조선 측 기록에 의하면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죽은 자가 6만여, 일본 측에서는 이것이 과장된 기록이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일본 측 자신의 사료에서도 음덕기에서는 진주성에 인구가 3만이고 그중 강으로 도망친 수백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가 죽었다고 기록되 있으면 또한 일본전사 조선역에서는 일본군이 취한 수급만 2만이 넘고[* 다시 말해 민간인을 대량으로 학살했다는 소리다.] 그 외에 엄청난 수의 포로를 포획했으며 익사한 자의 수도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하고 있다. 실제로 임란 후 진주 일대의 인구가 너무 급감해 행정 구역이 개편되기까지 했다. 살아남은 자는 황대중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여기서 포로로 잡힌 강우성은 일어 교육책자인 [[첩해신어]]를 쓴 바 있다. 전투 후 일본군은 진주성을 철저히 허물어 평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